개성인삼 STORY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함으로써 한반도에서 생산되는 인삼은 모두 고려인삼으로 통칭되기 시작했는데 고려 중기 이후부터 고려인삼의 명맥은 개성지방을 중심으로 유지되어 옴으로써 이것이 개성인삼의 유래가 되었다.
조선조 현종2년(1660년)에 개성에서 양직묘삼농법을 개발하여 널리 퍼뜨렸다는 기록이 있고, <영조실록>에 의하면 영조 원년인 1724년 개성에서 일복식 인삼재배법이 집중 연구되어 인삼의
인공재배가 일반화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을 뿐 아니라 산삼이 많이 채굴되었던 개성지방이 인공재배 조건으로도 적합한 자연 환경적 여건을 갖추고 있어 인삼재배를 선도한 곳은 고려의 옛 도읍이었던 개성(송도)임에 틀림이 없으며, 1910년 삼도
개성에서 송삼계원의 모임체인 삼도중을 인수하여 개성삼업조합이 조직되었다.
이로부터 개성은 오랜 동안 인삼 무역의 중심지 역할을 감당해 오면서
이로부터 개성은 오랜 동안 인삼 무역의 중심지 역할을 감당해 오면서
개성에서 선도한 인삼재배가 이후 전국으로 확산되어 오늘의 재배분포를 형성하게 되었 다. 6•25 전쟁으로 고향을 버리고 남하한 개성 삼농인들이 전쟁의 양상이 장기화할 기미를 보임에 따라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아래 남한에서의 삼업승계를 계획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고향에 두고 온 개성인삼의 종자를 가져오는 일이었다.
일시 피난 후 다시 돌아가게 될 것이라는 희망으로 그들은 대부분의 삼씨를 고향에 두고 온 처지라 천년을 이어 온 인삼재배의 유업을
계승하기 위해 삼농을 이어 갈 젊은이들로 결사대를 조직하여 해병대의 지원아래 고향으로 침투하여 꽁꽁 얼어붙은 땅을 파헤치고 개갑을 위해 땅속에 묻어 두었던 삼종자를 꺼내 와서 다시 인삼재배를 시작한 것이다. 1953년 휴전 협정 이후 개성 삼농인들은 포천, 연천, 강화, 김포, 용인, 이천, 광주, 안성, 시흥, 고양, 파주 등 경기도 일대로 분산되어 인삼재배의 의지를 확장하여 오늘과 같은 삼사업을 진흥시키게 되었다. 남한으로 옮겨져 뿌리를 내린 개성인삼이 1957년 개성 출신 삼농인들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서울에서 개성삼업조합을 재 창립하고 전매청 당국의 지원아래
식재면적을 확장해 나갔으며 포천, 연천, 김포, 강화, 용인을 중심으로 고려인삼의 유구한 역사를 다시 이어 나가게 되었다. 개성삼업조합은 경작면적의 확산에 따라 1967년 10월 개성, 강화, 김포삼업조합으로 분할하게 되었으며 1973년 9월 사무실을
서울에서 주산지인 포천으로 이전하게 되었고, 1978년 3월 인삼산업법에 따라 개성인삼경작조합으로 개칭되었다가 1989년 1월 인삼협동조합법의 제정으로 개성인삼협동조합으로 다시 개칭되었으며 2000년 7월 농협법 개정으로 농협과 통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개성을 중심으로 한 북위 38도선 근방이 인삼재배의 최적지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지금은 개성이 이북지역이라 포천, 연천 지방의 위치와 기후 및 토질이 개성지방과 거의 같아 개성인삼의 최대 생산지로 손 꼽히고 있을 뿐 아니라
양직묘삼 식재로 전국에서 생산되는 인삼 중 체형이 가장 우수하고 내용조직이 충실하며 고유의 향이 짙고 사포닌 햠량이 많아 홍삼수율이 가장 높은 6년근 인삼이 바로 이 곳에서 가장 많이 생산되고 있다.